"민주주의는 효과적인 제도지만, 완성되는 데 인내가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이 아니라, 관용과 자제입니다. 관용은 경쟁하는 상대 정당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자제는 신중함과 인내를 담보로 합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의 '어른 김장하의 씨앗' 작가와의 만남 강연에 참석해 연사로 나섰다.
문 전 대행이 연사로 나선 배경에는 김장하 선생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장학생과 후원자다.
1965년 경남 하동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김장하 장학생'으로 학비를 받았다.
이날 도서전 강연에는 이준호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정경순 주한 파나마대사관 선원부서 팀장, 책 '줬으면 그만이지'의 김주완 작가와 '다큐 김장하'를 제작한 김현지 MBC PD도 함께 했다. 이들 역시 '김장하 장학생'이다.
김장하 선생은 1922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에 나눔을 실천해 왔다. 그는 1983년 사재를 출연해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진주에 환원했다. 또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대상으로 장학금 등 학비를 지원했다. 여태 약 1000명의 장학생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전 대행은 "39년 전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금을 받은 그때 기억이) 지금의 삶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김장하 선생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이유 만으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했다.
문 전 대행은 지난 2019년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당시에도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받은 바를 사회에 갚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헌법재판관이 되더라도 그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한 바 있다.
이준호 교수도 김 선생에게 받은 가르침을 거론하며 "나 또한 젊은 세대를 지원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며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모습을 젊은 세대에게 봤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게 어른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 전 대행은 이날 도서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그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닌 관용과 자제"라면서 "관용은 경쟁하는 정당을 인정하는 것이고, 자제는 권력행사에서 신중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난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을 예로 들며 "관용과 자제로 의대증원을 추진했다면 지금쯤 (정원이) 500명은 늘었을 거다. 대통령은 법률이 제정되면 집행하는 사람이지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사회통합은 국회가 하는 거다. 국회에서 경쟁하는 정당을 인정하고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장하 선생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모두 존경하는 삶을 살았다. 그것은 변방에서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전 대행도 평생 진주와 경남지역을 떠나지 않았던 김장하 선생처럼 대학 시절과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때를 제외하곤 부산·경남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퇴임 후엔 부산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김장하 선생의 삶을 따르고 있는 문 전 대행은 이날 지역소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내놨다.
그는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지만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울 중심 사고를 버려야 한다"며 "지역 기반의 다양성을 토대로 창의를 일으켜야 한다. 서울 시민의 창의성은 끝났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을 살리는 길에 예산지원과 서울시민의 아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이재명 정부의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정책을 말하며 "걱정이 많은데 부산도 사람이 살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드러냈다.
도서전을 주관한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남녀 관람객 성비를 나누진 않았으나 체감상 도서전을 방문한 관람객의 십중팔구는 여성이었다.
2년 만에 도서전을 방문한 현암사의 조미현 대표는 "정말 많은 관람객이 방문한 것 같다"며 "관람객이 이렇게 늘어나는 건 출판계 경사"라고 했다.
다만 여성 관람객들 위주로 행사가 진행되고, 책보다는 '굿즈'에 주목하는 문화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고 덧붙였다.
'어른 김장하' 선생을 조명한 북토크에 참가한 김주완 작가는 "여기 오신 분 중에 남자분은 19명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도서전에 사람들이 이렇게 붐비는데, 우리나라 독서율은 왜 이리 낮을까, 출판사들은 책이 안 팔린다고 아우성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서전을 처음 방문한 대만 작가 천쉐는 "도서전이 매우 창의적"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출판사 글항아리 부스에서 기자와 만나 "책이 매우 많고, 관람객도 매우 많다"고 말했다.
대만의 대표적인 중견 작가인 그는 이번이 첫 한국 방문이다. 그러나 한국 문화와는 친숙하다고 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좋아하고, 한국 문학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비롯해 김초엽, 박상영 등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도서전이 매우 "컬러풀하다"면서 get more info 놀라워했다. 그는 "책뿐 아니라 블링블링한 굿즈도 많고, 한마디로 볼거리가 풍성하다"며 "마치 도서전이 볼거리가 풍부한 한국 드라마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폐막일임에도 도서전은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대형출판사부터 중소출판사까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나 해외 출판사 부스는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출판인 노먼 아흐메드는 "정말 훌륭한 도서전인 것 같다. 사람들도 많고, 매우 컬러풀하다"고 했다. 다만 "외국 출판사 부스에는 사람들이 몰리지 않아 아쉬운 측면도 있다"고 곁들였다.
외국인 부스를 찾는 한국 관람객의 발걸음뿐 아니라 해외 출판인의 발걸음도 올해는 줄었다. 지난해에는 18개국에서 122개 출판사가 참석했으나 올해는 16개국에서 106개사만 참여했다.